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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열 남궁씨

by 달빛의 꽃 202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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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열 남궁씨 

안녕하세요.달빛의꽃입니다. 

함열 남궁씨에 대해 알아봅시다. 

 

 

 

👉남궁씨 연예인 알아보기 

 

 

 

 

함열 낭궁씨는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남궁원청이 고려 성종때 여진족을 백두산 이북으로 몰아낸 공으로 문하시중평장사에 임명하였다. 

 

함열 남궁씨 기원 

 

남궁씨의 유래는 중국의 고대 에서 비롯된다.본래 주나라의 왕족인 희성이었다. 주 이전의 상나라때 남쪽 궁에 살았다. 남궁으로 씨를 정하였다고 하므로 희성남궁씨가 된다.

 

남궁씨를 처음 사용한 인물은 남궁괄로 추청된다. 남궁괄은 주문왕의 사우중 한사람이다. 그가 대장군으로 있을 때 폭군인 상나라 주왕에 의해서 투옥된 문왕을 기지를 발휘하여 구해내기도 하였다. 

 

그는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를 건국한 공신으로 이상서에 오르고 한 지방을 식읍으로 받아 다스리게 되었으며 그곳의 지명을 그의 씨를 따라 남궁현이라하였다고 전했다. 춘추시대 공자의 사위가 된 남궁괄과는 동명이인이다. 

 

한국 남궁씨의 원주는 주나라의 남궁수이다. 남궁수는 기자와 함께 조선에 동래하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기자조선을 건국하고 사도의 직에 올라 백성들에게 시서와 예약을 가르쳤으며 , 음식의 예법과 제사에는 편두를 쓰게 하며 의관제도와 직제를 중국과 같게 하였다고 한다. 

 

함열 남궁씨  역사 

 

 

시조 남궁원청은 비서량을 역임하고 991년 고려 성종 10년 대장군이되어 여진족을 백두산 북방까지 몰아내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워 문하시중평장사에 임명되었으며 , 감물아백에 봉해졌다. 이후 세보가 실전되어 그의 후손 남궁득회를 1세조로 한다. 남궁득희의 증손 남궁민은 고려 충숙왕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간의 대부를 지냈다. 

 

 

인구 

 

1985년 3,812가구 15,901명

2000년 5,666가구 18,703명

2015년 20,715명 

 

 

 조선 왕실과의 인척관계

 

정신옹주(종종의 서녀 ) 사위 남궁식

 

 

과거 급제자 

 

함열 남궁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5명을 배출하였다. 

고려문과 , 문과 ,생원시, 진사시, 음관 등  과거 급제자 배출하였다. 

 

 인물 

 

남궁민

 남궁득회의 장손 1336년 (고려 충숙왕 복귀 )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347년 정치도감이 설치되었을때 정치관에 임명되어 경상도도 민전 겸 안렴존무사로 활약하였다. 벼슬은 간의 이르렀다. 

 

남궁계

6세손 문음 으로 출사하여 3품에 올랐고 , 1401년 태종 좌명원종공신 3등 에 책록 되었다. 

태종 1413년 대호군을 지내고 1426년   정주목사 거쳐 판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430년 (세종 )동지총제를 지내고 1430년 동지총제를 지내고 ,1435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6년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후 한성부윤이 되었다. 1439년 전라도 도절제사를 거쳐 경주부윤에 제수되었다. 

1443년 중추원부사에 이르렀고 ,1446년 졸하자 세종이 부의를 내리고 조문하였다. 

 

남궁찬

 

 

9세손 자는 어헌 호는 창량 할아버지는 군수 남궁치이고, 아버지는 생원 남궁순이며 , 어머니는 감찰 최돈의 딸이다. 1477년 성종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489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1493년 (성종) 이조 좌랑을 역임하고 1495년 ( 연산군) 사간원헌납과 홍문관교리를 역임하였다. 

 

1497년( 연산군 )문시 정시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1498년 흥문관부응교가 되었다. 1499년 봉정대부 의정부 사인 지제교 겸 승문원 교감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제주목사에 부임하였고 , 1504년 연산군  관찰사가 되었다. 

 

남궁숙 

 

( 1491년 1533년 )  10세손 아버지는 관찰사 남궁찬이고 , 어머니는 신자승의 딸이다. 

1516년 (종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중종 별시 문관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무원박사에 보임되었다. 활쏘기에 능했으므로

 

1536년 교서관 부정자로서 관사에서 1등하여 자급이 올랐다. 이후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1544년 안산군수로 재직중 청렴근면하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경기도 관찰사 홍섬의 장계에 따라 가자되었다. 

 

 

1547년 명종 승정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54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다. 해주교생 안세복 등이 남궁숙이 선정을 베풀었으니 계속 유임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처하자 가선대부로 가지되었다가 전라도 관찰사로  전임되었다. 

 

1550년 (명종)  한성부우윤를 역임하고, 1551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1553년 명종 10월 23일 종 2품 동지중추부살로 졸하였다. 명리를 탐하였으나 직무에는 근면하여 사람들이 능력있는 관리라고 일컬었다.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 86에 있다. 

 

 

남궁익

이조판서 남궁찬의 둘째 아들 문음으로 한성부 가낭관을 제수받았고 , 증종조에는 수운판관을 명종조에는 동복 현감을 역임하였다. 부인은 김인감 의 딸인 연안 김씨이다. 아들은 남궁희 , 남궁침 , 남궁개이다. 

 

 

 

 

남궁침

(1513년 ~1573년) 동복현감 남궁익의 아들 1540년 중종)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44년 사간원정언, 1546년 사간원정언, 1546년 지평 , 헌납을 거쳐 1548년 홍문관 수찬으로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구황 실태를 조사하고 돌아왔다. 

홍문관 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파견되어 민생의 고층을 탐문했고, 지방 수령들의 탐학을 적발하고 , 이조좌랑과 부응교를 역임했다. 1552년 흥문관전한을 거쳐 ,경상도 어사로 중추부사 , 1558년 진위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녔으며 , 같은해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625년 한성부우윤, 한성부좌윤을 거쳐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64년 전라도 관찰사,1562년 함길도 관찰사로 나갔고, 1566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67년 명종의 승하시 부총관으로서 치안을 담당하였고, 선조가 즉위했을때 형조참판으로 재직하였다.

 

 

 

 

남궁제

 

아버지는 함경도 관찰가 남궁숙이고, 어머니는 고흥 류씨이다. 1568년(선조) 증광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백천 군구와 연안 부사를 역임하였다.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선조 ) 류성룡이 감진관에 임명하여 호남에서 조운된 곡식을 이용해 한양의 기근 문제를 해결하였다. 지방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백성을 잘 다스리고 국사를 성실히 처리한 점을 인정받아 1596년

(선조) 당상을 가자 받았다.

 

 

남궁경

 

1562년 ) 자는 여명, 호는 풍계 , 고조부는 남궁판 할아버지는 남궁개이고, 아버지는 남궁도이며 어머니는 이진중의 딸이다. 

 

1606년 (선조) 사마시에 급제 ,1612년 광해군에 현감으로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6년 행 세자시강원필선으로 선조실록을 찬수하는데 참여하였다. 

 

이듬해 지평으로 광해군의 처사를 지탄하는 흉격지변을 처리할 때 병을 핑계로 불참한 까닭에 체직되었다가 곧 검상 사인을 역임하였다. 1618년 강홍립이 도원수로 창성에 갔을때 유장으로 종사관이 되어 따라갔다가 기역마를 남용했다는 이유로 이듬해 1월에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에는 산직되었다.  그러나 대북파에 적극 가담한 것이 아니었기때문에 풀려나 1625년 (인조)에는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남궁집

(1601~1668년)  자는 강중,호는 삼졸재 ,아버지는 남궁율이며, 어머니는 한옹의 딸이다. 1618년 (광해군) 사마시에 합격 , 1630년( 인조)에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전경시강에 우등하여 좋은 말 한필을 상으로 받았다. 인조 ,효종때에는 대하선,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당시 붕당정치를 비판하면서 붕당설을 상소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동,서 양당이 여러 파로 갈라져 인물 추천에 편당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편당이 되어 바른 말을 하는자를 배척하여 비루한 자가 등용되어 대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물을 등요하는데 있어서는 마음이 공정하고 식견이 밝고 도량이 있는 자를 삼공의 자리에 앉힐 것과 재질과 기량이 적당한 자들을 뽑아 6조 3사의 장으로 삼아 책임있는 인재 등용을 하도록 함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붕당론은 당시 당쟁으로 빚어지는 상황을 잘 지적하고 있다. 저서로는 삼졸와유고가 있다. 

 

 

 

남궁옥

 

 

(1620년 ~1699년 자는 여상 호는 청주, 아버지는 관찰사 남궁율이며, 어머니는 한옹의 딸이다. 

1646년 인조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2년( 효종)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 1669년(현종) 예조정량을 길재 ,김장생을 제항한 서원에 사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뒤 일곱번이나 군헌의 수령을 지냈다. 1960년 숙종 16네는 승문원 판교 겸춘추관편수관을 거쳤으며, 시정까지 이르렀다. 문장솨 서화에 뛰어났으며 , 특히 속필로 유명하다. 

창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작품으로 개풍천마산의 대흥사중건비문의 글씨가 있다.

 

 

 

 

 

 

 

남궁석

 

 

(1938년~2009년) 한국통신 하이텔 사장, 삼성전자 정보통신 총괄사장, 삼성 SDS 대표이사 사장. 제 5대 정보통신부 장관 제 16대 국회의원 

 

 

 

 

남궁진

 

 

1942년~ )

제 4대  문화관광부 장관 제 14 15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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